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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곁에 싹터 우리 안에 피어날

 

홍경한(미술평론가)

 ‘돌’은 흙 따위가 굳은 광물질의 단단한 덩어리이다. 사전적으론 바위보다 작고 모래보다는 큰 것을 이른다. ‘돌’의 특성은 대체로 무겁고 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리적 힘이 가해질 경우 깨지거나 부러질 위험도 크다. 반면 어떤 매개(관계)에 의해 이타적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 ‘돌’이다. 시간에 의해 모래가 되었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돌’의 특징이다.

‘돌’을 사람으로 형상화한 작가 박정용의 ‘스톤 피플(Stone People)’은 본질적으로 자연이라는 명사를 통한 생명의 탄생과 죽음 이후 한줌 흙이 되는 ‘돌’의 순환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 자체로 자연의 순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또한 다양한 질곡을 품은 풍화 안에서의 ‘돌’처럼 삶의 단락 및 인생여정을 대리한다 해도 무리가 없다.

물론 그의 ‘돌’은 단단하면서도 연약하고, 무겁지만 가벼우며, 견고하지만 어딘가 부드러운 인간의 양면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특히 ‘관계’라는 매질에 의해 성격을 달리한다는 점에서도 ‘돌’과 인간 삶은 닮았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박정용의 작품에 ‘돌’의 상을 한 인간들이 등장하는 이유다.

이처럼 박정용의 작품들은 자연의 그것에 순응한 채 ‘돌’과 삶의 부딪침 사이에 자리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의 원초적인 미감에 인간의 감성을 대입 확장시키는 작업이지만, 어쩌면 그저 자연처럼 놓이고자 하는 의도가 투영되어 있다 해도 무리는 없다.

다만 작가의 근작들은 ‘돌’에 빗대어 인간(-삶)을 말하면서도 부정적인 측면 보다 밝고 아름다운 장면으로 가득하다. 한때는 다소 절망적이거나 막막함의 기호로 작동했던 것도 사실이나, 수년 전부터는 그의 그림 속 중요한 상징인 꽃처럼 “어디론가 열심히 뛰어가고 사랑을 나누며 춤을 추는 인물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화사하게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꽃들처럼 평범하지만 끈질기고 아름다운 우리 삶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그린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Kiss>(2013~2021) 연작이다. 온갖 꽃과 식물이 만발한 가운데 두 사람이 포옹하고 있는 이 그림들은 마음을 주고받는 사랑의 대화를 마치 꿈처럼, 환상적으로 보여준다. 눈과 코, 입이 배제되어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자연의 축복을 받으며 한자리에 선 이들의 모습에서 평온함과 안락함, 사랑의 감정이 물씬하고, 그 순간의 달콤함은 현실 너머의 세계까지 이어진다.

<키스>와 함께 눈여겨봐야할 또 다른 작품은 신작 <디스코 팡팡 위의 연인>(2021)이다. 여기서 ‘디스코 팡팡’은 놀이동산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탈 것 중 하나이다. 빙글빙글 돌며 요동치는 탓에 중심잡기가 꽤나 어렵다. 하지만 그의 작업 속 ‘디스코 팡팡’은 단순한 유희적 도구가 아니라 일정한 틀 안에서 이어가야할 삶과 직결된다. 잇따라 미끄럽게 도는 기구의 움직임은 인간 삶의 순환을 나타내고, 휘청거리지만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그림 속 인간의 모습에선 균형 잡힌 삶의 태도와 지향점을 알 수 있도록 한다.

<디스코 팡팡 위의 연인> 속 명사인 ‘연인’은 일차적으론 작가 부부를 일컫지만 그 삶의 테두리에 놓인 이들 모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결국 이 작품은 자신과 아내를 포함해 세상이라는 둘레의 가장자리내지는 범위나 한계 내에서 살아가는 인간 모두를 뜻하고,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도 아닐뿐더러 때론 고난으로 힘들고 흔들리겠지만 함께 극복하며 이겨내자는 메시지를 함유하고 있다는 게 옳다.

흥미로운 점은 박정용 작업의 경우 창작의 동기가 작가 자신의 개인사를 밑동으로 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는 우리의 삶과 이상성을 포괄하지만 창의의 바탕이 되거나 작품에 내재된 이야기는 모두 사적 영역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도 매우 특정적인데, 바로 그의 아내와 관련이 깊다. 즉,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아내’를 소실점으로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그림들은 뭔가 잘 되지 않았을 때의 상황을 담았지만 오히려 담담하고 초연하게 그림으로서 역경을 이겨내며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를 엿보게 하는 작품 <긍정의 왕>(2019)을 비롯해,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담은 작품인 <인기 많은 여인>(2014), 그리고 일단의 성취에 안도했는지 짐짓 여유로운 몸짓을 하고 있는 <휘파람>(2020), 비로소 무언가를 차지한 듯 의기양양함을 읽게 하는 <빅토리(Victory)>(2020)에 이르기까지 화두의 중심엔 자신의 아내와의 기억, 경험들이 새겨져 있다.

20여송이의 튤립을 한 아름 안고 있는 작품 <나 이 꽃 좋아!>(2018)에서의 ‘나’라는 대명사 역시 현재의 아내이며, 주요 작품 중 하나인 <키스> 속 상대방도 대상은 동일하다. <키스>가 그렇고 <디스코 팡팡 위의 연인> 역시 매한가지이다. 대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여겼던 아내와의 로맨스가 작품 활동기간 전반에 걸친 간절한 바람과 세레나데로 표현되었다.”

이밖에도 작품 <달려가다> 시리즈(2013~2017)나 작품 <날아오르다>(2014)처럼 평원과 하늘, 바다를 향해 내달리며 날아오르고, 작품 <댄스> 시리즈(2019~2020)에서마냥 기쁨에 겨워 홀로 춤을 추는 작업 등도 결이 같다. 작품 <너에게 간다>(2014)와 작품 <끌어안다>(2018)에서 읽히듯 누군가에게로 줄달음쳐 격렬하게 끌어안는 그림들도 앞선 언급한 작가와 그의 아내 간 로맨스를 다룬다. 그렇게 ‘돌 인간’은 작가 자신의 삶을 반영하는 캐릭터이자 창작의 동기가 되어 10여년의 시간 아래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 중에서도 2021년 작품 <디스코 팡팡 위의 연인>은 현재와 미래를 새긴 작업이다. 이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이 과거로부터 근래의 이야기를 전제로 한다면, <디스코 팡팡 위의 연인>은 드디어 사랑을 이룬 뒤 부부작가로서 하나 되어 함께 미지의 공간으로 달려가는 현재를 자축(촛불 환히 켜진 꽃)하고 아내에 대한 남편으로서의 짙은 애정과 다짐, 바람이 동시에 버무려져 있다.

이 가운데 ‘남편으로서의 짙은 애정과 다짐, 바람’은 특히 언젠가부터 아내가 좋아하는 분홍색(꽃)이 화면 전반에 분포되는것에서 익히 징후를 드러내더니 “당신과 내가 인연을 이룬 기나긴 시간을 통한 확률과 같이 당신의 곁에 예쁜 꽃이 싹을 틔워 우리의 삶에 감동이 전해지길 기대해본다.”는 작가의 고백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혹자에겐 닭살 돋는 멘트일 수 있지만, 필자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으로 다가온다. 묘사력 출중한 그림자체도 그 고백을 충분히 뒷받침한다.

물론 비교적 인지 가능한 구상작업에 대한 호불호나 매체의 다양성에 대한 아쉬움, 미학적 깊이와 시각적 경중을 논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가리키는 지점은 조형보단 너의 곁에 싹터 우리 안에 피어날 그 무엇이다.

여기서 그 무엇은 구체적으로 예술적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는 뮤즈(Muse)를 통해 기쁨의 에우테르페(Euterpe)와 사랑스러움의 에라토(Erato)를 생성하고, 궁극적으론 각자의 삶에서 ‘풍요로운 환성’(타레이아(Thalia))을 발견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것에 있다. 나아가 예술가로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사랑의 진폭이 그림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전이시켜 희망을 발견케 하려는 노력과 믿음도 각인되어 있다. 그것만으로도 박정용의 작업은 예쁘고도 맑다. 그리고 그 예쁨과 맑음에 동화되는 이들의 수만큼 그 가치도 커지고 있다.■

스톤피플, Stone people 

최미남 (산속등대 미술관 관장)

섬세한 묘사와 색채표현이 탁월한 박정용 작가의 ‘Stone People’의 모티브는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향 개울가에서 우연히 마주친 작은 조약돌을 보고 외형의 크고 작음이 중요치 않음을 깨닫고, 자연으로 회귀하고자하는 인간의 본질에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는 이상적 존재로서 자신과 대중을 투영하여 감정을 극대화하는 작업을 펼치고 있다.

여성의 인체에 수려한 자연을 접목시킨 ‘섬’, 돌을 의인화한 ‘댄스’ 연작에서처럼 화폭을 채운 스톤 피플은 인간의 고유성을 대변하고 박정용 작가가 주도하는 초현실적 세상에서 소통과 표현을 위한 상징적 캐릭터로 다양한 스토리텔링과 마주하고 있다. 여기에 작가의 섬세한 몰입과정이 더해지며 완성된 서정성은 Stone People에 자연스럽게 얹히어져 환기되고 있다.

박정용 작가의 작품 속에는 ‘돌’이라는 무기물이 지닌 단단함과 묵직함에 나무, 풀, 꽃이 매개되어 무겁지도 과하지도 않은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는 자연이 주는 원초적인 미감에 인간의 감성을 투영한 결과물로 구체적인 경험치를 토대로 화폭에 세워진 다양한 일상의 전개가 작가의 삶과 인간의 삶을 자연물로 대변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으로는 녹록치 않은 현재를 살며 담대함으로 역경을 이겨내는 시대적 영웅을 그린 ‘긍정의 왕’과 마티스의 작품을 차용하여 타인과의 교감과 희망의 공존을 표현한 ‘댄스’, 여리여리한 풀잎과는 대조적으로 강한 승리의 기운이 느껴지는 ‘빅토리’, 연인의 입맞춤을 담은 ‘키스’, 마네의 작품을 차용해 원화가 가진 이슈를 걷어내고 오롯이 박정용 스타일을 보여주는 ‘풀밭 위의 점심’등이 있다. 이들은 대자연이라는 공간 속에서 뛰거나 춤을 추거나 마주보거나 응시하거나 유희하며 초현실적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을 찾아가는 작업은 무표정의 얼굴 구현이 아닌 돌의 정돈되지 않은 여러 가지 질감의 외형과 행동, 몸짓 등으로 반전되어 나타난다. 또한 표정 연출이 아닌 스토리텔링으로 관람자로 하여금 작품 이해와 공감능력을 극대화하며 자연물이 주는 형태나 색, 포즈 등을 통해 감정을 유추하는 작업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자연을 의인화한 박정용 작가의 Stone People 연작을 더 깊게 들여다보고 공감하며 조망하는 전시로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삶과 작품 속에서 성실히 녹여내어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작가의 다음 작업이 더욱 기대된다. ⓒ

긍정의 왕 162.2×130.3cm oil on canvas 2019

풀밭 위의 점심, Natural Union

 

안현정 (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풀밭 위의 점심>(1863)에서 모티브를 따온 박정용 작가는 관객들을 자극한 여인의 누드 대신 사실적 필치가 녹아든 ‘Stone People’을 선보임으로써 ‘현실을 고전으로 만들 것’을 주장한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이론을 영리하게 재현해 냈다. 19세기 파리의 아카데미즘에 돌을 던진 최악(?)의 작품들은 모두 마네의 것이라고 평가받던 시대, 고상한 주제를 가장한 ‘비너스의 에로티시즘’에서 벗어나 살롱의 권위에 최초로 도전한 화가가 바로 마네였다. 당시 아카데미가 권장하는 기법은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하고 물감 칠을 매끄럽게 하여 표현의 세밀함을 강조하는 것이었고, 명망 있는 화가일수록 커다란 규모의 대형 그림을 출품하여 경제적 여유를 누리던 부르주아지의 눈을 잡아끄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네가 이 작품으로 파리의 유명인사가 된 것처럼, 박정용은 고전 방식을 차용한 대형그림 위에 자신만의 ‘아방가르드’를 올려내어 지금까지 이어온 ‘자연과의 물화(物化)’ 속에서 자신을 미술사 상에 위치시킬 ‘결정적 계기’를 도모한 것이다. 완벽한 데생과 색의 재현에 충실하면서도 명암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안정적 구도와 빛을 오늘의 인식 속에 위치시키려 한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등장인물들의 포즈와 구성이 다른 대가들과의 콜라보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 마티스의 <춤>에서 모티브를 딴 작품은 오마쥬(hommage, 경의의 표시)라기 보다 작품의 현실해석에 충실한 ‘변형과 재(再)조직화’의 과정을 따른다. 피카소가 말년에 거장들의 작품을 다양하게 변조하는데 집중한 것처럼, 마네가 <풀밭 위의 점심>에 매달려 150개의 드로잉과 27개의 회화습작을 남긴 것처럼, 박정용 작가는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실험하기 위해 다양한 형식실험을 감행했다. 작품 속 이야기들은 종교적 시선이나 전통적 모티브 등의 규율적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명작을 어떻게 오늘에 살게 할 것인가?”라는 은유적 결합(Union)을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연물로 대체된 인체들은 외설논란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한 누드의 외연을 보여준다.

마티스의 댄스에서 모티브를 따온 Stone People의 ‘덩실~’ 포즈를 살펴보면, 인체의 성기를 그대로 노출시킨(naked) 듯한 시대의 파격을 보여준다. 성(性)을 지워버린 대상들, 그 안에서 휴식과 춤으로 삶을 대체한 작품들, 초월적 로맨스를 야기시키는 일상화된 행복의 향연은 마네가 오늘을 살았다면 그렸을 “파격이 예술이 된 현실” 그 자체를 표현해내고 있다. 손을 잡는다는 것은 자신을 극복하고 타인과 교감한 긍정의 상태를 의미한다. 박정용은 댄스라는 작품에서 ‘희망과 공존의 스토리텔링’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동료작가와의 결혼을 통해 행복을 위치시키려는 작가의 내적 동기와도 연결된다. 자연물을 통한 질서와 조화(Universe), 행복한 삶을 향한 자기투사(自己透寫, Self-Reflection)와 같이 초기부터 천착해왔던 진지한 형식실험들이 삶의 유희로까지 이어져 삶의 행복을 ‘스토리텔링’하는 여러 요소들과 결합하게 된 것이다. 작가의 고민은 ‘지금-여기(只今-, here and now)’ 속에 녹아 있다. 그가 그려낸 풀밭 위의 점심은 행복한 일상을 향한 솔직 담백한 자기고백인 셈이다.

 

Stone People, 몰입(沒入)에 관한 스토리텔링

 

그렇다면 박정용 작가는 왜 작업의 주요 대상을 Stone People에 담아냈을까. 섬세한 묘사와 탁월한 색채표현이 강점인 초창기 작업들에는 러브스토리, 삶의 행복, 고통의 층차 등 여러 단면이 존재한다. 작가는 죽어있는 자연 속에서 우리시대의 자화상을 발견하고자 했다. 자연물이 주는 감수성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시각, 자기 중심화 된 어린 시절의 재조명을 의미한다. 어느덧 어른이 돼 버린 ‘사회 속 존재들’은 더 이상 특별하지도 원초적이지도 않은 채 하루하루를 같은 날처럼 살아낸다. 작가는 어린 시절의 특별한 나를, 꿈이 많던 우리 자신의 원형을 작품 속에 등장시켰다. 원초성을 지닌 변하지 않는 대상, 그것은 도시와 어우러진 채 누워있는 자연 그 자체였다. 북한산의 삼각바위를 머리로, 도심과 어우러진 하나의 산을 인체로 표현한 ‘산시리즈’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자연을 의인화한 시도들은 바다위에 떠있는 섬 자체가 자신일 수 있다는 기본에 충실한 자기해석의 결과였다.

이러한 형식실험은 개울에서 만난 조약돌 하나의 깨달음에서 일단락되었다. 손안에 담긴 작은 돌 안에도 거대한 자연의 이치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2012년 아시아프(ASYAAF)에서 산시리즈가 모두 판매 되었을 때, 작가는 다음 작품을 위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우연히 방문한 고향마을의 개울가에서 발견한 작은 조약돌은 바위산의 전체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바위산은 멀리 있는 풍경으로만 존재했지만, 작지만 소박한 조약돌의 속에는 거대한 자연의 이치가 담겨 있던 것이다. 이러한 몰입(物))의 과정 이후 Stone People은 다양한 스토리텔링과 만나게 되었다. 2013~2014년의 작품에서는 매끈하게 정돈된 돌의 외연을, 2014년 이후부터는 돌의 여러 질감 속에서 내연-인간의 여러 감정(喜怒哀樂愛惡慾)을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깨진 돌에서 조차 고통을 이겨낸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의인화된 돌의 다면성은 섬세하게 배려하는 작가 자신을 둘러싼 스토리텔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돌은 여러 감정을 가진, 시공간을 넘어온 나의 역사입니다. 바꿔 생각하면 또 다른 나의 모습이자, 우리 모두의 자화상일 것입니다. 이들이 모여 추는 춤은 우리 주위를 둘러싼 조화와 공존의 움직임입니다.” - 2019년 작 ‘댄스 시리즈’ 중에서

13.풀밭위의 점심 162.2×130.3cm oil on canvas 2

로망스, 스톤 피플의 세레나데

 

허나영(미술평론)

동행 162.2×130.3cm oil on canvas 2017 (2).

넓은 평원을 스톤 피플이 뛴다. 얼굴에 눈코입이 없어 표정이 보이진 않지만, 분명 스톤 피플은 즐거워하고 있다. 돌의 감정을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몸짓 언어 때문이다.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에는 말과 글 뿐 아니라, 표정과 몸짓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호학에서 논리적 질서를 가진 랑그(langue)와 함께 파롤(parole) 역시 의미 발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듯,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의미체계 외에도 비언어적인 체계 역시 중요하다. “좋다”라는 말 만해도 정말 신나서 인지 혹은 비꼬는 말인 지 그 뉘앙스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같은 말을 해도 눈썹의 움직임이나 얼굴의 근육으로 그 말이 거짓인지 참인 지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박정용의 스톤 피플은 몸짓이라는 비언어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갖는다.

그렇다면 작품 속 스톤 피플은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대중가요나 드라마, 소설 등에서 숱하게 다뤄진 주제지만, 박정용 작가가 보여주는 스톤 피플의 사랑이야기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을 싹 틔우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과정이지만, 그 속의 세세한 내용은 다르다. 마치 ‘나의 사랑이야기’가 소설 속 이야기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지듯 말이다. 그렇다면 박정용 작가가 표현한 스톤 피플의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리고 어떤 감정을 전달할까.

 

사랑의 낭만적 표현

박정용 작가는 근 몇 년 간 스톤 피플이 만들어가는 사랑이야기를 주요 주제로 삼아 작업을 해왔다. 지난 개인전의 제목에도 삼았던 ‘로망스(Romance)’의 사랑이다. 로망스는 노래나 문학이 있듯 사랑을 뜻한다. 그 중에서도 이성적이거나 이타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남녀 간의 애정에 가깝다. 실상 남녀 간의 로망스에 대한 향수는 중세 문학에서 공주와 기사 간의 이야기에서 유행하기 시작해서, 프랑스 혁명 시기 낭만주의(Romanticism)에 절정을 이룬다. 이 시기 많은 회화와 소설, 음악 작품에서 인간의 감성에 대한 주제와 함께 빠질 수 없는 소재로 사랑이야기가 다뤄졌다. 그리고 지금, 현대적 낭만주의가 형성되고 있다.

이는 디지털 매체를 통하여 점차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구현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영화나 애니메이션과 같은 대중매체 뿐 아니라 가상현실은 각종 첨단 기기를 통하여 일상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다. 그렇기에 현대인들은 이전에 기술적 한계로 구현하지 못하고 상상만 했던 여러 낭만적 이야기들을 실제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회화는 여전히 가상현실을 시각화하는 우리에게 친숙하면서도 효과적인 도구이다. 그래서 박정용은 디지털 매체적 감각과 개념에 익숙한 세대로서 회화라는 전통적인 매체로 상상의 세상 속에서 특히 사랑이라는 인류 보편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돌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비현실적 매개체를 통하여 말이다. 그래서 디지털 매체를 통하지 않고도 초현실적인 세상을 화폭에 구현한다. 이는 세밀하게 그려진 돌과 그 사이에서 자라는 풀과 꽃의 표현으로 더욱 극대화된다. 마치 사진과도 같은 사실적 묘사는 돌로 만들어진 사람이 실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스톤 피플들의 낭만적 상황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렇기에 초현실적 세상에서 구현된 현대적 낭만주의의 사랑, 박정용이 그린 스톤 피플의 사랑에 대한 표현은 이렇게 한 마디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뭔가 거창한 듯도 하지만 실상 작품 속에서 스톤 피플이 나누고 이야기하는 사랑은 그리 거대하지 않다.

 

사랑의 성취

박정용이 스톤 피플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3-4년 전부터이다. 작업을 시작할 때에는 인체 형상을 한 산이나 섬을 그리다가 점차 돌이라는 특정한 자연물을 의인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돌로 만들어진 사람이라는 주요 소재에 작가는 ‘스톤 피플’이라는 캐릭터의 이름을 붙였다. 작가에게 있어서 작품의 주요 소재를 결정하는 것은 예술인생의 새로운 문을 여는 중요한 지점이다. 더불어 박정용에게 개인적으로도 사랑하는 이를 만나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스톤 피플은 작가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야기에 따라 표현되었다. 그 첫 만남은 <인기 많은 여인>에서 드러나듯, 여러 남성들과 함께 구애를 하면서 부터이다. 구애라는 표현이 진부하긴 하지만, 그림 속에서 여러 스톤 피플들이 꽃을 들고 꽃밭의 한 여인을 향해 날아가듯 뛰고 있는 모습이니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다행히 사랑은 이루어졌지만, 그 행복감은 마치 당장이라도 구름처럼 흩어질 듯한 느낌이었다. 너무나 행복했기에 그런 걸까? 그 만큼 서로 더 끌어안고 있는 모습은 이들의 로맨틱한 사랑의 달콤함을 관객에게도 충분히 전달한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더 없이 행복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구애를 위한 경쟁과 만남 그리고 사랑을 성취한 과정은 작가와 그가 사랑하는 여인과의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작품 속 스톤 피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가와 작품 속 캐릭터가 같이 살아가기에 작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스톤 피플의 움직임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관객들이 박정용의 작품에 공감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에게 스톤 피플의 사랑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어 하고, 사랑의 결실인 아이들과 함께 한 따듯한 집에 스톤 피플이 만들어내는 낭만적인 세계를 걸어두고 싶어 하는 이유일 것이다. 거대하고 원대한 이념이라기보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봤거나 혹은 느끼고 싶어 하는 그러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박정용이 표현한 스톤 피플을 통해 경험하게 된다.

 

사랑, 그 영원한 가치를 위하여...

박정용의 작품을 보면서, ‘사랑’이라는 뻔하고도 극적인 감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지만, 막상 사랑에 빠지면 불가항력적인 시간까지도 이전과 다르게 흘러가고 더 없이 건강해지거나 혹은 병이 오기도 하는 신체적 반응까지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렇기에 숱한 예술작품의 오랜 주제이기도 하다. 박정용은 그러한 사랑을 만들어 내거나 극화시킨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스톤 피플을 통하여 풀어내었다. 사실적인 묘사를 통한 초현실적 화면을 통해 말이다. 그러면서도 박정용은 점차 더 회화적인 맛을 화면에 나타내고 있다.

뛰어가는 스톤 피플이 향하는 무지개 너머의 세상이나 돌 사이로 흐르는 폭포, 구름 등 행복이 가득할 것 같은 미지의 세계를 회화적 붓질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표현적 변화들은 박정용의 스톤 피플 그림이 조금씩 변화하는 시점에 왔다는 것을 예시하는 징후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박정용이 말하듯, 그동안의 이루어졌던 작업들을 총정리하는 기회이다. 그리고 그간의 작업을 넘어 새로운 작업으로 도약하게 되는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후 박정용의 스톤 피플이 또 어떠한 모습으로 변할지 상상해보며,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성실한 회화적 표현과 위트있는 움직임을 통해 그려낸 박정용의 작품을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박정용, 돌에 ‘사랑의 신화’를 불어넣다

 

글_김윤섭(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미술평론가)

인기많은 여인 193.9X97cm oil on canvas 2014.jp

흔히 표정이 없고 감정이 메마른 사람을 두고 ‘돌 같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만큼 삶에 낙도 없고, 상대방에겐 재미없이 무감각하다는 얘기도 된다. 그래서 ‘돌’에 대한 선입견으로 ‘딱딱함, 경직됨, 차가움, 거침, 무거움…’ 등 다소 부정적인 요소가 많다. 그러다보니 돌이라는 소재는 ‘인간적인 면’과는 거리감이 있기 마련이다. 굳이 인간의 삶과 연관 짓자면, 돌에 영적인 생명력이 있다는 믿음으로 ‘신앙의 대상’인 토템(totem)에 비유되곤 했다.

 

또한 선사시대부터 이어져온 일종의 기념물로써 거석문화(巨石文化)는 ‘자연의 여러 현상과 인간의 생사를 기원하는 환희와 공포의 대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역시 인간 자체에 대한 매개 역할보다는 태양숭배나 해양문화 등의 소산으로 기원의 수단에 쓰인 것이다. 이런 면들을 고려할 때, 돌을 소재로 삼은 박정용의 작품은 무척 흥미롭고 남다른 인상을 전한다. 볼수록 ‘객관화된 감정을 통한 교감’이 일어난다.

 

박정용의 회화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2013년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아트서울 아트페어였다. 공모를 통해 역량 있는 젊은 작가들을 선정한 아트페어답게 무척 참신하고 다양한 작품들이 많이 선보였다. 하지만 그중에서 박정용의 작품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의 부스엔 늘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발길을 멈추고 작품을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만면의 미소 일색이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어쩌면 남녀노소 모든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더 생길 정도였다.

 

박정용이 등장시킨 그림의 주인공은 예외 없이 ‘돌 인간’이다. 묵직하게 땅에 박혀 있는 망부석 같은 돌이 아니다. 너른 대지를 박차고 뛰어올라 어디론가 힘차게 내달리고 있다. 그런데 더욱 재밌는 요소는 팔과 다리나 몸통엔 하나같이 한 아름 꽃다발이 차지했다. 바위에 돋아난 수북한 꽃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안 맞는 궁합이다. 하지만 박정용의 그림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원래 태생부터 둘은 한 몸인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삶의 노곤함으로 천근만근이 된 관람자를 대신해 ‘자유로운 영혼의 일탈’을 꿈꾸게 한다. 결국 박정용의 ‘달리는 돌 인간’ 시리즈는 ‘꿈을 향한 여행’의 기쁨을 선사한다.

 

“다양한 모습과 감정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과 자연의 모습은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자연으로 지어진 인체는 사람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라는 가정 하에 자연물의 이미지 위에 사람들의 행위를 덧입혀 보았습니다. 작품들을 통해 실제적인 형상의 재현으로는 느낄 수 없는 더 깊고 본질적인 ‘사람과 삶의 감정에 대한 고귀함’을 담고 싶습니다.”

 

박정용의 말처럼, 돌을 등장시킨 이유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상징성’을 비유한 것이다. 굳이 종교적인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모든 생명체는 돌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진실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돌에는 또 다른 생명이 움트고 있는 지도 모른다. 박정용은 돌이 지닌 미세한 생명성에까지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소통을 위해 채널을 맞추고 같은 언어를 선택하듯, 돌들에게 사람의 몸짓과 표정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가슴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것은 감동과 낭만어린 ‘사랑의 신화’이다.

 

박정용이 그린 돌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매우 부드러운 표면을 지녔다. 마치 각질을 제거하고 수분 팩이라도 한 피부와도 같다. 따지고 보면 잘 연마된 돌의 표면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매끄럽다. 더없이 거칠고, 한없이 부드러운 상반된 면모를 동시에 갖춘 것이 바로 돌인 셈이다. 이처럼 박정용의 섬세한 붓 터치로 태어난 돌 혹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생동감을 자아내는 비밀은 따로 있다.

 

박정용의 그림에서 살아 있는 듯 생동하는 돌의 표현은 결코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박 작가는 한 점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할애에 돌을 만져보고 관찰하길 반복한다. 위아래 좌우 등 사방에 따라 달라지는 돌의 표정, 공간의 시점에 의한 돌의 방향성, 표면의 색감과 질감 등 다양한 요소들을 관찰하고 또 관찰하길 되풀이 한 다음에야 화면에 스케치를 시작한다.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과 과정이 투자되어 사람의 체온까지 느껴지는 돌 인간 시리즈가 탄생하는 것이다.

 

박정용 그림에서 놓쳐선 안 될 부분 중에 ‘포즈들’을 꼽을 수 있다. 포즈는 크게 ‘달려감ㆍ포옹ㆍ사색’ 등 세 가지로 나눠진다. 먼저 어딘가로 정신없이 달려가는 율동이 많다. 그 속도감에 진한 꽃향기가 진동할 듯하다. 다음으로 남녀가 서로 얼싸안거나 다정하게 마주보는 장면들이다. 그리고 어딘가 정처 없이 긴 그리움으로 응시하고 있는 장면도 인상 깊다. 그런데 가만히 눈여겨보면 모든 작품들의 귀결점은 ‘사랑의 세레나데’이다. 홀로 뛰어가는 ‘남성 돌’에서 환희의 에너지가 넘치는 것도 머지않아 그녀를 만나 진한 포옹을 할 것이란 확신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을 닮은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기발하고 아름답고 행복하며 위트 있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저 역시 기발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위트 있는 작가로서, 또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림을 바라보는 관점은 매우 다양하다. 같은 그림이라도 보는 이에 따라 매우 다른 인상을 전달한다. 하지만 공통점은 ‘행복을 발견하는 창문과도 같은 존재’라는 점이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린 앙리 마티스도 “미술이란 고달픈 하루가 끝난 후 쉴 수 있는 안락의자같이 편안해야 한다.” 말했다. 그렇게 보면 적어도 박정용의 그림은 마티스가 말한 그 ‘편안함’을 물론, 볼수록 사랑의 감정이 쏟아나는 기쁨의 엔도르핀까지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림의 역할이 그렇게 어렵지 않고, 일상에서 얼마나 소중한 연인과 같은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Park Jungyong breathes 'myth of love' into stones

Written by Kim Younseop (director of Korean Arts Management Institute, art critic)

 

We usually say people who are expressionless and emotionally dry are 'like a stone.' It also means they have no fun and indifferent to others. Stones are associated with negative images like being 'stiff, cold, rough, or heavy.' As a result, stones are not thought of as something 'human.' They, however, used to be considered as a 'totem' with the belief that stones have a spiritual life.

 

Also, the megalithic culture from the prehistoric period is believed to be an 'expression of exultation and fear for natural phenomena and wish for humans' survival.' Here, also, stones were used as tools for prayer as a result of sun worship or marine culture, rather than as a medium for humans. In that sense, the works of Park Jeongyoung who used stones as the main material are very interesting and impressive, as they show 'connection through objectified emotion.'

 

It was during the 2013 Art Seoul Art Fair at Hangaram Art Museum that I first saw paintings of Park. The art fair, which selected competitive young artists from a contest showed refreshing and diverse artworks. However, Park's works drew my attention especially. Many people stopped at his booth and looked at the artworks. And they were all smiling. I wondered how the paintings could make everyone so happy.    

 

 The subjects in his paintings are 'stone humans.' They are not stones that are just sitting and rooted in the ground. They jump and run to somewhere. Interestingly, they have a bunch of flowers on their limbs or torso. A bunch of flowers on a rock. It just does not sound normal. However, it is in Park's paintings. The two are harmonized so naturally that they look like they were born together. And they make viewers, who are tired from busy life, dream of 'escape from everyday life.' After all, Park's 'running stone human' series gives the joy of 'journey to your dream.' 

 

 “I find that people, who live their life with different looks and emotions, are very similar to the nature. That is why I wanted to apply human actions to natural objects, because 'the human body that is made of nature is the most essential part of people.' I want to convey the 'dignity of human life and emotion' that cannot be felt by recreating real objects in my paintings.'  

 

 

As Park says, he chose stones as a 'symbol of the human essence.' Without any religious context, all life came from stones. Even at this moment, all stones must have another life in them. Park paid attention to the subtle vitality of life. Like we choose a channel or language for communication, he gave human gesture and expression to stones. And he conveys stories from deep inside, the 'myth of love.'  

 

The stones Park paints have very smooth surface, like the skin that was exfoliated and moisturized. When you think about it, ground stone surface is smoother than anything else in the world. Stones are both very rough and very soft. There is a secret to the natural vitality in the stones or rocks created by brush strokes of Park.   

 

The lively stones in Park's paintings were not born by accident. For a painting, he observes and touches stones for a long time. After observing the expression of a stone from different angles, direction of the stone from the spatial point of view, and other elements like color and texture, he begins the sketch. And the stone human series was created with such long time and process.  

 

 One of the things you should not miss in Park's paintings is the 'pose.' The poses are divided into running, hugging, and thinking. First, the stones are running somewhere. You can almost smell the floral fragrance from the speed. Next, you see a man and woman hugging or looking at each other. And also, the stones are gazing at a distance. However, all of these lead to 'serenade of love.' You feel that this 'male stone' who is running alone has so much energy because he is going to hug her soon.

 

There are many ways to view a painting. The same painting gives different impressions to different people. However, they are all a 'window for discovering happiness.' Henri Matisse, the magician of colors, also said, paintings must be comforting like a rocking chair you can rest in after a tiring day. In that sense, Park's paintings have the comfort and also endorphins of love. They show how paintings are not so difficult and that they are like precious lovers in dail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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